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(문단 편집) === 정치 입문 === [[타바스코주]] 마쿠스파나 출신으로[* 타바스코 소스의 원료가 되는 타바스코 고추로 유명한 지역이다. 물론 타바스코 소스는 멕시코가 아닌 미국에서 제조된다.] 어렸을때부터 대통령이 꿈이었다고 하며, 1972년 [[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]] (UNAM)에 입학했고 이곳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. 이 시절의 로페스 오브라도르는 정치인으로 입문한 뒤의 삶과는 영 딴판으로 학생운동가 스타일은 아니고 조용한 스타일이었다고 기억되고 있다. 1976년 대학을 졸업한 뒤에 제도혁명당에 입당했고 유명시인으로 상원의원 후보로 출마한 [[카를로스 펠리세]]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Carlos_Pellicer|#]]의 선거운동을 지원했다.[* 다만 카를로스 펠리세는 당선 1년 후에 사망했다. 이미 나이가 80에 가까운 고령이었던 것도 있었지만 말이다.] 그가 제도혁명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이유는 당시 멕시코 정치가 제도혁명당 [[일당 우위 정당제]] 시절이였기 때문이다. 제도혁명당의 대선 득표율은 기본적으로 70%를 넘었고 대통령 선거보다 제도혁명당 경선이 훨씬 중요하게 여겨졌을 정도였다.[* 이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된 것은 1988년 대선 이후의 일이다.] 그래서 제도혁명당에 입당해야 정치인으로써 입지와 미래가 보장되었고 제도혁명당 이외의 나머지 정당들은 군소정당에 불과했다.[* 그나마 국민행동당 정도가 규모가 컸지만 국민행동당조차도 이 시기에는 선거에서 10%대의 득표율을 올리는데 그치는 말 그대로 만년야당에 불과했다.] 로페스 오브라도르는 제도혁명당에 입당한 뒤로 한 동안 타바스코 주 마얀에 위치한 시골에 살았는데 거기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, 멕시코 토착민 [[연구소]] 대표 직함까지 달며 5년간 살았으며 1982년 [[타바스코]] 주지사였던 엔리케 곤잘레스 페드로가 당선되면서 제도혁명당 정치위원회 사회연구소장이라는 직함을 달았고 1983년에 제도혁명당 타바스코 집행위원회 위원장 직을 맡게 되었다. 그런데 이 당시 제도혁명당이 우경화되어 로페스 오브라도르의 성향과 다른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. 어쨌든 후에 [[멕시코시티]]로 발령나게 되면서 멕시코 연방 소비자 보호국으로 발령났으며 연구활동에 전념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